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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그르인의 항거를, 끝나지 않을 자존의 투쟁의 정신을 지지합니다 !!
서역땅.. 신장 위그루의 유혈사태, 동영상의 전경에 마음이 아픕니다.
소위 신장이라고불리는 중국 서북부지역 위그루자치구. 요즘 그곳에서 위그르인 민중봉기가 일어나
한족과 위그르인간의 민족유혈사태로 번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소수민족인 위구르 무슬림을 탄압하고, 수십년 동안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위구르인들..
리즈 우루무치 공산당 서기는 “156명(사망자)을 살해한 사람은 전원 사형에 처할 것이며 살인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대부분 학생” 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식 ‘사형’ 이 현재 위구르 사태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고 그 대상자가 대부분 학생이라는 점은 실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위그르인들은 왜 이처럼 죽음을 무릎쓰고 봉기를 했을까요.
역사적 연원은 1949년 중국 모택동 공산당이 무력으로 신장지역을 서북공정의 일환으로 침공하여 중국정부의 한 주로 편입시키면서부터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정부에 의해 60년 동안 죽은 위그르인들이 2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번 위구르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고 중국 내부에서는 늘 고민 덩어리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소수 민족이 55개 정도나 되면서 중국은 진정한 통일 국가 형태를 이루기에 어려웠던 것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에 앞서 티벳 사태도 그랬지만 이번 위구르 사태는 티벳과 비슷한 경향을 띠면서도 시위 강도가 더 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위그르는 그 선조가 투르크 족입니다. 투르크는 돌궐족으로 고구려시대 때 몽골초원을 주름잡으며 당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찝적거릴때, 고구려와 돌궐은 형제국으로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견제하기도 했지요. 돌궐은 단군조선시대에는 우리와 한 지붕하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공산당정권의 한족 1등 국민, 변방 소수종족 2등 국민의 정책에 따라 소수민족인 위그르인들이 차별을 받다가 봉기 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민족 자존을 위해 그 제단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있는 것이지요.
티벳도 마찬가지 처지구요.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티벳과 신장 위그루지역 동북3성(만주, 요하 지역)
그리고 내몽골은 중국 땅이 아닙니다. 동북3성의 만주지역은 북간도라고 불리지요. 우리민족의 유이민사에서 만주는 한맺힌 땅이지요. 중국인들 스스로도 만주를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 후반 만주족들이 만주국을 세우잖아요. 한족은 그곳을 한족 땅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아무튼, 위그르에 대한 중국정부의 탄압는 고구려사를 위협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떠올리며 남의 일만이 아닙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지금 북한의 평양 근처까지가 자기들의 땅이라고 표시되어 나옵니다.
위그르인들의 끝나지 않을 투쟁을.. 그 민족 자존의 정신을 지지합니다 !!
2. 중국 5대 자치구중의 하나 ㅡ 중국의 북서부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역)
정식 명칭은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自治區)’로 면적은 160만 제곱킬로미터. 이는 티벳 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갖고 있으나 넓은 인구에 비해 인구가 1,689만 명에 불과. 넓은 영토에 작은 인구는 중국 한족의 진출로 인한 문화 동화 현상을 빠르게 진행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
행정구역은 성도(수도)는 우루무치(鳥魚木齊)이고, 2개의 시(市)와 17개의 현(縣)급 시, 그리고 85개의 현으로 구성. 중국이 티벳과 함께 이 지역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바로 지하자원 때문. 90년대 들어 타림분지 등에 대한 석유, 천연가스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어 석유와 천연가스, 석탄, 니크롬, 니켈, 석면등 76종의 광물을 생산.
이렇듯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이 지역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만, 근본적으로 이슬람교 중심과 외모, 문화 등이 한족과는 현저히 달라 다른 자치구와는 달리 통합 자체의 어려움이 극명하게 존재.
이번 유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위와 같은 역사, 문화적 배경이 있고 실질적인 원인은 중국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도 불구하고 한족이 경제 성과를 모두 가져가는 불평등이 촉매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루무치 지역은 1인당 평균소득이 2003년 9823위안에서 2007년 1만6860위안으로 70%이상 늘었지만, 중국 정부가 이 발전의 주요 원인으로 서부 대개발 등의 정부 지원도 한몫 했다는 명목으로 많은 이득을 챙겨 간 것이 위구르족의 불만을 사게됨.
현재 시위대의 주된 주장은 ‘분리 독립’ 이 아닌 ‘차별 금지’ 와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불만이라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의견.
관광객이 늘 북적이며 ‘중국 속의 이국(異國)’ 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색다른 이슬람 문화를 보여 줬던 우루무치는 현재 무장경찰이 쭉 둘러 싸여 있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
이번 사태를 보면서 중국 정부의 소수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55개의 소수 민족 중 우리와 연관된 조선족은 현재 192만 명으로 전체 중국 인구의 0.2%를 차지하고 소수민족 순위로 14위(1위는 1617만 명의 좡족)에 있으며 주로 지린, 헤이롱장 랴오닝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민족 통합을 위해 자신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전파하며 소수민족의 고유 문화를 사라지게 하는 문화정책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고스란히 적용하고 있습니다. 문화 역사학적으로 ‘동북아 공정’ 으로 우리는 중국의 이런 정책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대비하는 방안을 만들어야겠지만 그 옛날 만주족(현재 1068만 명)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
3. 중국과 위르루 ㅡ 그 역사적 배경
신장의 남부 지역이 한(漢)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것을 제외하면, 신장위구르 지역의 대부분은 중국과는 무관한 곳이었습니다. 13세기에 칭기즈칸에 의해 정복당하여 지역 전체가 몽골제국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제국이 와해되면서 일상적인 유목 생활로 복귀해 버렸습니다. 더구나 칭기즈칸은 중국인이 아니므로 신장위구르 지역의 대부분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던 셈.
신장위구르 지역이 중국의 지배하에 떨어진 것은 청(淸)나라 때였습니다. 한족이 아닌 만주족(여진족의 후예)에 의해 정복을 당한 것이죠. 그리하여 1884년 중국의 일개 성(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당시 위구르족은 일시적으로 정치적인 통일체를 이루어 중앙 정부에 대항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중앙 정부의 통제보다는 현지의 반독립적인 군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공산당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다시 1955년 신장위구르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신장의 남부 지역이 한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난 이후 신장위구르 지역은 위구르족 통치자의 통솔하에 정치적인 통일체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 동안 결속되지 못한 채 무정부 상태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유목민족의 정치적 패턴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신장위구르 지역은 유사 이래로 중국이라는 폭력 앞에
맞설 만한 힘이 없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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