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적인 전술 구사로 한국대표팀을 16강전으로 이끈 홍명보 감독이 파라과이전에서 꺼내들 또 다른 승부수는?ⒸKFA 홍석균
수에즈에서 2시간 남짓 자동차를 내달려 카이로에 도착했다. 어느덧 이집트에 온지도 2주. 미지의 땅에 대한 설렘이 고향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뀌어 간다. 우리네와 다를 것 없는, 이집트 하늘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이 한가위의 향수를 더한다. 선수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 16강이 열리는 카이로로 향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 더없는 선물이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거리 곳곳에서 이집트 국기며 대표팀 유니폼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가뜩이나 축구열기가 대단(이집트 프리미어리그 16팀 중 카이로를 연고로 하는 클럽이 6팀이나 된다)한데 이집트가 U-20월드컵 16강에 올랐으니 이해 못할 것 없는 풍경이다.
한국 교민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카메룬과 첫 경기 결과에 아쉬운 숨을 내쉬었지만 독일전 무승부에 이어 미국전 승리로 한국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자 응원 열기가 달아올랐다. 특히 파라과이와 16강전(한국 시간 10월6일 새벽 3시)이 대다수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는 카이로에서 열려 교민 사회가 집중하는 총력 응원을 준비 중에 있다.
한국이 남미의 복병 파라과이를 꺾으면 1983년 멕시코 대회 4강 이래 최고의 결과에 닿는다. 1991년 포르투갈 대회 때 8강에 진출했지만 남북 단일팀의 성적이었다. 2003년 UAE 대회 때는 16강에서 멈췄다. 파라과이전 승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1983년 대회의 결과와 견줄 수 있다. 멕시코 대회 때는 본선 참가국이 16팀이라 조 예선을 통과하면 곧장 8강이었다. 1991년 때도 마찬가지. 홍명보호가 파라과이를 물리친다면 U-20월드컵 본선에서 5경기를 치르는 두 번째 기록이다. 물론 그 이상이 불가능하지 않다. 참고로 U-20월드컵 본선 참가팀이 현재와 같은 24개국으로 확대된 것은 1997년 말레이시아 대회 때다.
2009 FIFA U-20월드컵 16강 한국-파라과이전의 기록사적 의미다.
미국전 직후 병원 응급차에 오른 오재석. 주전 우측 풀백으로 활약한 오재석의 부상 공백으로 수비라인의 재배치가 불가피하게 됐다.Ⓒ풋볼리즘
파라과이전 세 가지의 변수
파라과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남미 선수권에서 U-20월드컵 최다 우승국 아르헨티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은 파라과이에는 스페인 비야레알 B팀 소속의 공격형 미드필더 에르난 페레즈, 남미 선수권 최다 득점자 로빈 라미레스, 한 때 AC밀란에서 관심을 표명했던 스트라이커 페데리코 산탄데르 등 요주의 공격수들이 버티고 있다. 이번 대회 조 예선 3경기에서 단 한 골만을 내줬을 만큼 수비력 또한 녹록하지 않다. 홍명보 감독은 “파라과이의 전력을 살펴보니 공수 전반에서 빈틈을 찾기 쉽지 않았다”고 평했다.
파라과이전은 변수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부상 변수가 첫 번째다. 조 예선 3경기에서 한국대표팀의 우측 수비를 책임졌던 오재석이 왼 허벅지 부상으로 사실상 대회를 마감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투지 넘치는 대인방어 등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여주었던 오재석의 부상 결장은 홍명보호 수비라인의 재배치를 뜻한다. 두 가지 대안이 점쳐지는데 왼쪽 풀백 윤석영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전방에서 뛰었던 김민우를 왼쪽 수비수로 내리는 방안과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 소속의 정동호를 오재석 자리에 투입하는 안이다. 카메룬전 부상 회복 중인 최전방 공격수 김동섭의 투입 여부도 지켜봐야 한다.
두 번째 변수는 체력이다. 단기간 치러지는 토너먼트 대회의 체력 중요성은 이미 지켜본 일이다. 2,3일 간격으로 경기를 치러야 하기에 일정이 진행될수록 체력 싸움의 양상으로 경기가 흐르는 경우가 잦다. 16강전부터는 단판승부로 경기 운영이 조심스럽고 승부가 연장으로 이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 카이로에서 조 예선을 치른 파라과이는 이동 없이 한국대표팀보다 하루를 더 쉬었다. 잔디 적응과 체력 싸움은 파라과이전의 또 하나의 초점이다.
마지막 변수는 파라과이의 팀 컬러다. 파라과이는 남미의 개인기와 유럽의 팀 스피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국이 조 예선에서 상대한 카메룬, 독일, 미국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팀이다. 연령별 대표팀의 특성상 전술 흡입력(상대 팀과 경기 분위기에 따른 전술적 대처 능력)이 부족할 수 있는데 한국 선수들이 조 예선 때와는 다른 유형의 팀과 맞붙어 얼마만큼 스스로의 팀 컬러를 유지하며 상대에 대처할 수 있느냐가 경기 결과의 전술적 관건이다.
왼쪽부터 조 예선 카메룬-독일-미국전의 한국대표팀의 포메이션. 시스템과 선수 배치의 변화가 눈에 띈다.Ⓒ풋볼리즘
성공과 실패의 양면의 그림자
홍명보 감독에게 시선이 옮겨간다. 단판승부와 돌발 변수에 대처하는 상당 부분이 감독의 몫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명장으로 불리는 지도자들의 경쟁력 중 하나다. 새내기 사령탑 홍명보 감독이 넘어서야 할 관문이기도 하다. 기회인 동시에 위기이며 성공과 실패의 그림자가 상존하는 홍명보 감독의 파라과이전이다.
조 예선 과정에서 홍명보 감독의 상황 변화와 변수 대처는 도전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생활인으로서는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는 소극적인 편이지만 축구에 있어서만큼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홍명보 감독은 조 예선 과정에서 매 경기 도전적인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카메룬전 패배 다음 경기였던 독일전부터 홍명보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본격 발동됐예선 과정에서 매 경독일전서 카메룬전의 선발 중 5명을 교체 투입했고 포메이션을 4-3-3에서 4-2-3-1로 변경했다. 미드필드헄지 역삼각형에서 정삼각형 형태로 변경, 더블 볼란치 시스템 카드를 뽑아 들었다. 또 왼쪽 수비수 김민우를 측면 공격수로 배치하는 등의 승부수로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다.
미국전은 홍명보 감독의 공세적인 팀 운영을 재확인한 일전이었다. 독일전과 같은 선발 라인업으로 미국전 엔트리를 구성했지만 선수 포진에는 변화를 주었다. 왼쪽의 김민우와 중앙의 김보경 위치를 맞바꿔 대형을 짰다. 수비가 주력 포지션인 김민우에게 처진 스트라이커 임무를 맡겼다. 홍명보 감독은 이에 대해 미국의 장신 센터백을 공략하기 위한 변화라고 말했다. 높이로 정면 승부하기보다 발 빠른 김민우를 전방에 배치해 최전방의 박희성이 미국의 중앙 수비수들을 달고 빠지면 그 후미를 공략하기 위한 복안이었다. 실험적인 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주효한 대처였다.
미국전 후반 초반, 측면 수비수 오재석이 부상으로 쓰러지자 홍명보 감독은 공격수 이승렬을 교체 투입했다. 대신 윤석영을 우측으로 돌리고 김민우를 왼쪽 수비로 내리는 동시에 김보경을 중앙 미드필더, 이승렬을 측면 공격수로 배치하는 큰 폭의 변화를 꾀했다. 경기 중 새 판 짜기에 가까운 리빌딩이었다. 미국전 결과는 3-0 완승이었다.
변화에 맞서며 도전적인 전술 운용에 주저하지 않는 홍명보 감독의 리더십이 적지 않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만만치 않은 전력의 파라과이를 상대해서는 어떠한 형태로 표출될지 눈길을 향하게 만드는 지난 과정의 흔적들이다.
성공과 실패, 그것은 어쩌면 순간의 판단에 따라 좌우되는 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