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King Fish - Googoosh
Googoosh
인종이 다르고,
사는 지역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사는 곳에서는 대중 인기를 얻은 별들은
뜨고, 지고
그중 왕별이 가끔 나타나는데...
그 왕별 들중에서..
또,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존재감을 가진 별이 가끔 있어왔다.
이란의 Googoosh 는 그중 한 시대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할수 있다.
듣고, 보고, 춤추는 Audio Visual 을 막라했고,
1979 년 이슬람 혁명이전 ..
중동의 부국으로서 팔레비왕 시절의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
그리고, 혁명이후는 왕정의 향수를 대변하는
은둔했던 전설속의 King Fish 로 남았었기 때문이다.
팔레비 때의 그녀의 애칭은.. King Fish 가 아니었던가..!!
... 70년대 이란ㅡ 팔레비왕 시절은...
우리 나라에서는 .. 흑백 티비 보고, 새마을 운동으로 바쁜 시절이었고.. 한국의 낭자들이.. 간호사들이 중동부국에 돈벌러 가던 때 였다. 지금도 테헤란에 간호사로 오셔서 현지인과 결혼하신 할머니- 교회 권사님 한분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살고 계신다.
그때 King Fish 는 이란에서 이제 막 시작됐을,
컬러 티비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당대의 대표 곡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994 년 5월..
Theran 에서 2시간 반을 비행하여 Ahwaz 에 도착 하고..
Ahwaz 에서 다시 2시간 반정도..
2차선 도로 또, 산길을 지나..
이란의 남서쪽 황량한 산악 유전지대의 공사현장에
내가 도착 했을 때는 ..
이슬람 체제 하에서 그녀의 노래는 더 이상
밝은 대낮에 듣는 음악이 아닌,
금기시된 그러나, 암암리에 집에서 집으로 서로 서로 돌려보는
반혁명적인 유산으로 낙인 되어 있을 때이다.
장년층에는 자유로웠던 팔레비 시절의 향수를 달래는 ...
그리고, 자유스러움에 목말라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감추어진 문화의 자부심으로.. 전달되고
음지에서 복사되어.. 돌고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산악부족들
이란 사람들 마저도 그들을..바메이..(일자무식에 어거지 부리는 깡패족속 정도의 뜻) 라고 경멸해 부른다..
글자 그대로,,
법 없이 ㅡ 법이 있으나 마나 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황량한 지역에서 공사 캠프를 치고
관리가 되지 않는 지역에서..
관리과장이란 나의 직책은..
낮에는 현지인들에게 시달리고..
밤이면 귀국하겠다고 술먹고 행패부리는 한국인 기능공 들에게
시달리는 이중고에 ..
사람들에 대한 심한 회의감 마저 들 때였다.
그래도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 해고 다독거리며
좋은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근하고..
자고 나면 다시 새로운 에너지를 받게 된것은 ..~
당시 현지인들의 처절한 삶의 질에 비해..
이란의 과거..
길게는 페르시아의 찬란한 문명과..
짦게는... Googoosh 라는 숨겨진 훌륭한 대중문화의 유산이
있는 세계사속의 굴절이 있다는 자각에서 부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힘들고, 참담한 삶의 질속에서..
Googoosh 와의 만남은 작은 충격 바로 그것..
한때 질좋은 대중 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나 자신 또한,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이란의 한 대중 여가수 의 음악 속에서,
지친 생활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Googoosh ..
그녀는 그때... 첫 결혼에 실패한 이후,
아들과 테헤란에서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내 이란에서의 근무는 우여곡절 끝에 1996 년말 끝났고 ,,
그리고, 수년이 흘러서 ~
그녀에게 해외여행이 허락되고 캐나다 등에서 순회공연을
갖는 다는 것을 외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음악을 소개해준...이란의 친구들은..
우리회사의 현지인 직원들이었다..
.. 아가위 Dariusi Madadi 와
.. 아가위 Ashtari (아가위란 파르시 로 Mr. 란 뜻이다.) ~
이들 두사람은 아직도 친구로 남아있다..
그들에 대한 나의 인간적인 신뢰는 한번도 후퇴 해 본적이 없다.
이란의 오지에서 Ahwaz 에서 나의 현지인 심복이자 생사고락의
동지 ㅡ Madadi 는 내가 귀국하고는 Ahwaz 에서 직장 구하기 마저 힘든 어려운 처지 였는데..
그 일년 후.. 미수금 회수를 위해 이란 중앙은행에 출장 갔을때..
아이의 호흡기 질환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공기 좋은 테헤란
올라와 살게 되었다며 직장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
때마침 South Par 지역에 대규모 공사를 수주한 H사에 추천,
용캐 취직이 되었다.. 기뻣었고..뿌듯했는데..
그후 H 사로 부터 출장 갈때마다 좋은 직원을 소개 해줘서..
회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곤 했었다.
이후에도 Madadi 는 H 사에 근무하며,
이란인들이 선망하는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현지 직원중에
쭈~욱 가장 잘 나가는 고액 연봉의 ..드믄 해피엔딩이 되었다..ㅋ
" 좋은 친구는 오래 기억됨으로써 더 아름답다..~"
그때의 사람들과, 사람들간의 정과 애환 속에서..
기억속에 남아있는 선율이 ..
Googoosh 이기도 하다.
15년 가까이 시간은 흘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꾸준히 변했지만,
올 연말에도 어김없이..
겉 봉투에도 눈에 익은 난필의 주인공 ..
Ashtari 로부터 엊그제 먼저 연하장을 받았다...
되새김하지 않으면 희미하게 지워 질지 모르는
기억들을..
음악과 함께
잠시 되돌려 보고자 한다.
Googoosh, 1950 in Tehran, Iran, is an Iranian-born pop singer and actress.
In the 1970s, Googoosh was considered the most celebrated recording artist in Iran[2]. In addition to music, Googoosh
was also an actress in many Persian films of the 1960s and 1970s.
After the Iranian Revolution in 1979 she remained in Iran until 2000 but did not record or perform again due to the ban on
solo female singers.
Younger people have rediscovered her music bootleg recordings of her music.[3] Outside of Iran, she has a significant
following in many Middle Eastern and Central Asian countries,[4] and currently resides in Richmond Hill, Ontario
지금 캐나다 온타리오에 살고 있다고...~
흑백 티비에서 모습이 더 향수를 느끼게 하고..
청중의 환호와 박수속에서,
특별한 존재에게 보내는 존경과 사랑 느끼게 한다 ^^